바람난 철학사 - 2차원에 의한 자기구원 by 리즈


"2차원은 현실이다. 뇌과학이 언젠가 이 말을 증명해줄 것이다. 3차원에 의한 치유든 2차원에 의한 치유든 모두 같은 뇌 내 현상이며 따라서 이 두가지 현상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혼다 토오루를 읽기 전에 미리 '연애자본주의'에 대해 알아두면 이해가 한결 수월합니다. 연애자본주의란,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남녀간의 순수한 연애에 냉정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개입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현대에서 연애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남들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소수의 승리자들 뿐입니다. 이 때의 '재산'에는 돈 뿐만 아니라, 용모, 학벌, 가문까지 - 소위 '스펙'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심지어 학문까지도 여기에 포함될 수가 있는데, 저자는 와세다 대학 철학부 시절의 경험을 회고하며 철학이 진정성을 잃고 단지 멋 부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함이나 선량함 같은 인간의 내면적인 가치는 안타깝게도 연애자본주의에서 하나의 '재산'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자연히 돈 많고, 잘 생기고, 학벌 좋은 그런 간지남들만이 연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반대로 저 같은 씹덕후는 이 냉혹한 사회에서 도태되어 2차원에서나 구원을 찾아 헤매야 하구요. 혼다 토오루의 철학은 바로 이 연애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사실 연애 경험도 없는 제가 연애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결국 패배자의 정신승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일부러 벤츠에 가방을 두고 내린다는 속물적인 원나잇 연애담도 이젠 별로 놀라울 게 없는 이야기니까요.)

저자는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위대한 사상가들의 철학도 모두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합니다. 말인즉슨, 별처럼 빛나 인류의 지성을 환하게 비추는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 근저에는 사실 짝사랑이나 연애(혹은 결혼) 실패 경험에서 오는 고뇌가 담겨있으며,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색했던 것은 현실에서 얻은 고통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일견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세상에 대한 열폭이야말로 진보의 첫걸음이라고 오스카 와일드도 그랬잖습니까. 저자는 책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해 유명한 철학자들이 어떻게 사랑에 실패하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해나가는지, 나아가 그 일련의 과정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으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꼼꼼한 시선으로 조망하고 있습니다. 혼다 토오루의 이 세심하고 끈질긴 손길은 고대의 철학자인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 독일 관념철학의 거두들까지, 이름만 들으면 다 알만한 철학자들을 독자가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대담하게 폭로합니다. 이 손길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화적 존재인 석가모니와 예수도 피해갈 수 없는데, 저자는 종교도 종래에 체계화·교리화되어 널리 퍼졌을 뿐 시작은 상처 입은 그들 개인의 구원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실제로 종교의 기능과 일치하는 것이죠.) 또한 릴라당, 괴테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사랑의 실패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치열한 고뇌에서 비롯된 르상티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오타쿠를 주요 독자로 상정하고 쓰인 책입니다. 혼다 토오루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연애가 시장경쟁이 된 이 황량한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구원을 찾아 내면으로 침잠하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후예를 지목하는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현대의 아키하바라. 즉, 오타쿠들입니다.(하지만 저는 여기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습니다. 현실에 관심을 거두고 2차원에 투신한 오타쿠들이나 사랑에 실패하고 내면에서 구원을 찾은 철학자들이나 결국 일원론과 이원론의 관념대립이라는 고뇌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정작 중요한 건 그 다음이 아닙니까. 진부한 오타쿠 세대론으로 빠지게 됩니다만 흔히 '3세대'로 규정되는 지금의 오타쿠들은 단지 '동물적으로' 모에 컨텐츠를 소비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 그 '열폭 에너지'를 사회운동으로 분출하려는 변혁의지도 없고, 실존문제로 침잠하는 초월의지도 없고, 하다못해 경쟁논리에 적극 순응하는 승리의지도 없으니 그야말로 열폭 돼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오타쿠들의 이런 경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 두 집단은 같은 분모 위에 얹혀있기만 할 뿐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혼다 토오루가 어째서 이 사실을 외면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군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위대한 존재들의 정신은 후세에 널리 알려져 추앙받았을지언정, 본인들 대부분은 아주 기구한 삶을 살고 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 해봐야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일생 내내 욕을 먹었고, 안데르센은 심각한 외모 컴플렉스에 시달리다가 자서전을 날조했으며, 니체는 짝사랑하는 여인을 끝내 잊지 못하고 사창가를 드나들다가 매독에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 우리는 틀린 것일까요. 내면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것은 그저 패배자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아 쿄 여신님!

저자는 이에 대한 해답을 뇌과학에서 찾습니다. 우주물리학과 함께, 기존의 철학이 수행해내던 역할을 바톤터치 받은 뇌과학은 비록 그 역사는 짧지만 이미 다양한 실험을 통해 현실(3차원)만을 맹신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수도 없이 증명해내었습니다.

"현실감이라는 감각이 뉴런의 활동에 불과하다면 2차원에서의 강렬한 체험을 상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우리 체험의 3차원·2차원 여부가 아니라 현실적인가 아닌가라는 점이다. 3차원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외부세계를 거쳐 입력되는 정보량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차이다."

현실(3차원) 역시 물자체의 세계의 반영일 뿐, 정신세계(2차원)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게 그 요지인데, 쉽사리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만 그래도 저 같은 씹덕후에게는 이야말로 돈오의 실마리, 나아가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고 열심히 정신승리 하다보면 언젠가는 저도 이 견고한 자의식 속에서 구원의 빛을 볼 수 있겠죠. 물론 가장 좋은 건 현실에서 진짜 여신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는 거지만... 어차피 난 안 될 거야...

오타쿠 컨텍스트에 딱히 거부감이 없으신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좀 더 일상적인 예를 들겠다더니 레이와 아스카를 등장시켜 오타쿠에게나 친숙할 비유를 사용하는 점이나, 수감자들을 온화하게 만들기 위해 여성호르몬을 주사하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택하기보다 <키미키스>나 <츠요키스>를 플레이시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줘야한다는, 어떻게 보면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더 비인도적인 구제책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저자는 정말 뼛속까지 내츄럴 본 오타쿠가 맞습니다.) 철학 입문서로도 상당히 괜찮은 책이거든요. 철학이라는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학문을 개인의 실존문제로 리프레임 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됩니다. 비록 오타쿠적 자의식이 상당부분 반영되어있긴 하지만, 저자가 역설하는 메시지들을 하나의 결론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철학을 공부하는 데 유효한 관점 중 하나로만 이해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는 그랬습니다. 다만 오타쿠적 자의식이 좀 강하신 분들은 경계심을 가지시는 게 좋을 듯. 잘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 사유를 멈추고 "아 현실의 물질적인 가치를 외면하고 내면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는 낭만적인 나♡ 역시 난 대단해!" 같은 자뻑 드립을 치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죠. 우리는 열폭 돼지 씹덕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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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eventon 2009/07/25 23:11 # 답글

    요즘 철학관련 책을 읽어볼까 생각중인데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 제렘 2009/07/26 10:12 # 답글

    누군가 했더니 혼다 토오루 ㅋㅋㅋㅋㅋ
    물자체 개념을 오타쿠 옹호를 위해 써먹었다는걸 무덤속의 칸트는 알고 있을까

    꼭 읽어봐야겠음 'ㅅ'
  • 로쉽 2009/07/26 10:14 # 답글

    키미키스는 안해봤지만 아마가미를 볼 때 츠요키스와 함께 플레이시킨다면 아주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2009/08/28 03:13 # 삭제 답글

    수감자들을 온화하게 만들기 위해 여성호르몬을 주사하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택하기보다 <키미키스>나 <츠요키스>를 플레이시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줘야한다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군부대에서도 사고방지를 위해 야겜pc를 들여놓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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