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에 문답 by 리즈

옛날 블로그들 둘러보다가 찾았습니다. 저도 이 바톤 받았었네요. 4년전인가 이거 한참 유행하고 있을 땐 내심 하고 싶어도 바톤을 못 받아서 안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입소하기 직전에 이렇게 씹덕력을 폭발시킬 기회가 주어졌으니 있는 힘껏 영역표시를 하고 떠나겠습니다.


○ 모에 성향을 솔직히 고백해보세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아서 정리가 잘 안되지만 차근차근 시작해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본심(혹은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캐릭터를 좋아합니다.(이 때의 본심이란 사랑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연민이나 감동일 수도 있습니다.) 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같은 애매한 말을 썼냐면, 실제로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츤데레라는 신의 축복이 증명해내었듯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게 서툴러서 오히려 빤히 보이는 캐릭터는 그 나름대로 어어어어어어어어어엄청난(...) 매력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해서 쿨데레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감정을 숨기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죠. 쿨데레처럼 극단적인 포커페이스로 일관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철없이 굴면서도 속으로는 주판알을 열심히 튕기는 너구리 같은 타입도 있고, 심성이 어른스럽고 남들을 배려해주길 좋아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타입도 있을 수 있겠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나름대로 본심을 감추기는 하는데 방식이 너무 어설퍼서 귀여운 츤데레 타입도 있고요. 바리에이션은 아마 무한할겁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은 너구리(...)입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캐릭터의 예를 들자면, 대표적으로 [늑대와 향신료]의 현랑 호로, <사계의 여왕>의 분관국장 웰나, [동방프로젝트]의 이부키 스이카, 사이교우지 유유코, 그리고 해석에 따라 조금 달라지겠지만 [드래곤 라자]의 프림 블레이드도 이 유형에 속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이런 타입의 캐릭터는 실제 나이와 무관하게 외모가 매우 어리게 설정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외모를 십분 활용해 철없는 어린아이인 척 하면서 손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마련이구요. 보통 다른 인물들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끊임없이 장난을 걸어대는 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죠. 하지만 겉모습이 어려보인다고 알맹이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죠. 오히려 다른 어떤 타입의 캐릭터보다도 이 타입의 캐릭터가 훨씬 내면이 성숙한 경우가 많습니다. 끌어안고 있는 상처가 누구보다 크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있구요. 문제는 성격 어딘가에 괴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을 연 상대일지라도 진지하게 상대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장난이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하지만 사랑받고 싶으면 미덕보다 결함을 보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속이 깊어도 너무 스트레이트하게 성실하고 착해빠지면 재미가 없잖아요.(...) 저는 이렇게 살짝 비틀어진 성격이야말로 이런 유형 캐릭터의 정화이자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괴벽한 성격은 보통 대요괴의 오만함이나 초월자의 유희로 설명되는 경우가 보통이고, 그래서 외모는 매우 어리지만 실제 나이는 수백 수천이 넘어가는 엄청난 갭이 만들어지죠.

이 유형의 캐릭터는 설령 진지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습니다. 철없이 구는 기믹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유지해내지 못하면 다른 타입의 캐릭터와 다를 게 없거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가장 먼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오랜 세월을 살면서 얻은 지혜와 초인적인 퍼포먼스로 사태 해결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냅니다. 덕분에 이런 타입의 캐릭터는 가벼운 분위기의 러브코미디 보다는 전기적 요소가 뒤섞인 판타지물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아무래도 러브코미디에서는 특별히 눈에 띄는 실질적인 위협이 개입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내외의 갭으로 먹고 사는 이런 타입의 캐릭터는 좀 활약하기 힘들죠. 저는 그래서 [케이온!]의 타이나카 리츠만 보면 그저 눈물이 납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렴.(...)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으로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파티를 승리로 이끄는 갭만이 이런 유형 캐릭터의 매력의 전부인 것은 또 아닙니다. 이 다음 부분이 정말 중요해요. 대요괴, 초월자- 정신적으로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성격이 삐뚤어질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폭풍이 불어 닥쳐도 끄떡없을 거대한 노송 같은 이 캐릭터가 이면에 아직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혁명적인 모에와 함께 [외모<->나이], [행동<->내면]에 이은 세 번째 갭을 획득하는 겁니다. 갭 모에에 취약한 저 같은 사람은 이쯤 되면 거의 노예(...)가 된다고 봐도 무방할 듯.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인간다운 연약함이라는 것 역시 쉽게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마저도 어리게 구는 기믹에 희생당해야 해요. 대신 아주 암시적이고 은근한 방법으로,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이 세 번째 갭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게 간접적으로 드러난 컨텍스트 안에서 해당 캐릭터의 끊임없는 자기 희생과 타인의 고통에 주목할 줄 아는 이타심, 자신의 공에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 같은 실로 인간적인 미덕을 읽어내었을 때의 모에함이란 진짜 그냥 모니터 속으로 뛰어들어서 같이 살림차리고 싶어질 정도ㅠㅠ (여담이지만 이 세 번째 갭을 세련되게 드러내지 못해서 매력을 잃은 캐릭터가 바로 <하루우루>의 아이자와 미사키입니다.)

오오 받들라 웰나 여신


○ 모에 복장을 대답해 보세요, ○ 모에 소도구를 대답해 보세요

뭔 말이 더 필요함?


○ 모에 행동을 대답해 보세요

사실 첫 번째 질문에서 츤데레에 대한 생각도 따로 다룰 예정이었는데, 츤데레 이야기로 넘어가면 무슨 천일야화가 될 것 같아서 관뒀습니다. 대신 여기서 잠시 떠들어보자면, 아무리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날려도 가드를 내리지 않던 고집불통 츤데레 캐릭터가 결국 무너져 내리면서 주인공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이 순간은 정말 모에라는 만능의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보배로운 순간입니다. 진짜임.(...)


이건 뭐 아까도 얘기했구요.


○ 모에 장소를 대답해 보세요

그녀가 있는 그 곳이 세상에서 가장 모에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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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제렘 2009/06/01 02:49 # 답글

    아이자와 미사키 ㅋㅋㅋ
    아 이 문답 존나 뭔가 절실하다ㅠㅠ
  • 로쉽 2009/06/01 08:38 # 답글

    사람이 갈 때가 되니까 케케묵은 바톤을 파내어....아 ㅠㅠ
  • Reventon 2009/06/01 12:31 # 답글

    가벼운 기분으로 읽었는데 뭔가 엄청 심도있습니다.. 덜덜덜...
  • 라이엘 2009/08/11 01:43 # 답글

    이.. 이거뭐임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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